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괌 전투 (문단 편집) == 전투준비 == 일본 육군은 마리아나 제도 방어를 위해 31군을 편성하고, 만주의 [[관동군]]이나 중국전선의 병력을 차출하여 급히 배치하였다. 그중에서도 괌의 수비를 맡은 부대는 관동군 29사단인데 29사단은 예하 3개 연대 중 50연대를 티니안으로, 사단 사령부와 나머지 2개 연대(18, 38연대)를 괌에 배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괌으로 향하던 수송선 1척이 미군 잠수함에게 사냥당하여 18연대는 연대장 포함 병력의 절반과 모든 중장비를 상륙도 하기 전에 잃어버린다. 그밖에 1사단, 11사단도 각각 3개 보병대대, 1개 포병대대, 1개 공병중대씩을 보내어 48독립혼성여단, 10독립혼성연대를 구성하였고 그밖에 제1전차사단은 예하 부대들을 마리아나 제도 각 섬들에 분산배치하여 괌에는 9연대 1중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다른 사단의 전차부대와 합쳐서 '''치하 10대와 그보다 못한 하고 30여대'''를 기갑전력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그밖에 예전부터 주둔해온 괌 수비대 병력이나 직할 대공부대, 비행장 및 진지공사를 위한 해군 설영대([[미합중국 해군/공병|시설]]대) 병력 등 무려 2만여 명에 육박하는 병력이 있었으나 누가 일본군 아니랄까봐 지휘체계가 통일되지 않고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등등 해서 수비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다. 미군은 제3상륙군단 산하 3해병사단, 1임시해병여단, 77보병사단이 지상군의 핵심을 맡았다. 이중 3해병사단은 부갠빌 전투를 겪어 한 차례의 실전경험이 있었고, 1임시해병여단은 3개월 전에 임시여단본부와 4해병연대와 22해병연대, 해병헌병중대, 해병통신중대, 해병포병대대, 해군53시설대대로 임시편성한 급조된 부대였지만, 4해병연대는 5개월 전에 기존 1~4해병레이더스 대대로 새로 편성된 정예 중에 최정예 부대였고,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 22해병연대도 마샬 제도에서 6일 간의 전투를 통한 한 차례 실전경험이 있었다. 다만 77보병사단은 개전 이후 창설되어 본토에서 2년여동안 훈련만 하고 첫 실전 투입이었다. 본격적인 괌 탈환의 준비는 6월부터 시작되었다. 사이판 전투의 전조로 시작된 6월 19일 [[필리핀 해 해전]]에서 미 해군은 일본 해군 연합함대를 격멸하고 일본의 항모함재기나 마리아나 제도의 육상발진기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칠면조 사냥에 나서며 해당 지역에서의 제공권,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했다. 이후 사이판 전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미 해군은 전함과 항공기를 꾸준히 투입하여 상륙준비 포/폭격을 1달여에 걸쳐 실시했다. 한편, 미군은 상륙준비 포격 중 제1차 괌 전투 당시 항복을 거부하고 게릴라전을 수행 중이던 조지 레이 트위드(George Ray Tweed) 중사와 통신연결에 성공, 그를 구출해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